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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보림사 주지 종진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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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8회 작성일 25-12-03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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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보림사 주지 종진 스님

 
   

민주화 투사에서 ‘마음 혁명가’로 전환한 명상 수행자

형제 대부분 목사·장로
어머니 불심 따라 불연

19세 때 처음 백양사행
‘고3 출가 불가’에 귀가

광주 참상에 ‘항거 의지’
학생운동…제·복적 거듭

러시아 유학서 인식 전환
“마음 바꿔야 세상 변해”

‘코로나 19’ 여파 속
5년간 6억 불사 회향

보림사 명상 템플스테이
무종교·이웃종교인 호응

캠핑형 템플스테이 추진
부지 확보…2027년 오픈

마을 법회 겸 노인잔치
대 호응 “동네에 활기”

“누구나 편히 머무는
수행·치유 공간 기대”

보림사 주지 종진 스님은 “보림사가 수행의 도량이자, 머문 이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치유의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사진=신용훈 기자
보림사 주지 종진 스님은 “보림사가 수행의 도량이자, 머문 이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치유의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사진=신용훈 기자

칠보산(七寶山)은 정읍의 진산이다. 보물처럼 아름다운 일곱 갈래의 숲과 계곡을 품고 있는 이 명산의 중턱, 보림사가 자리하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 창건된 이래 천년의 법등(法燈)을 이어온 이 고찰에서 현재 한 스님이 새로운 수행 도량으로 일구고 있다. 바로 종진 스님이다. 

경남 진주의 한 집안, 여덟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형제들은 대부분 목사와 장로, 권사로 성장하며 기독교 신앙 안에서 삶을 꾸려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굳건한 불심을 간직하고 계셨다. 경남 지역 사찰에 불사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형편 닿는 대로 목재를 보냈을 정도다. 절로 나설 때는 늘 막내의 손을 잡았다.

“한겨울의 차가운 법당에서도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부처님 앞에 절을 올리셨습니다. 두 손을 모은 어머니의 손끝에서 전해지던 따뜻함과 경건함,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순간은 훗날 한 수행자의 정신적 씨앗이 되었는데, 그 싹이 처음 고개를 든 건 열다섯 살 무렵이었다.

“절에서 법문으로 들은 ‘미친 코끼리에게 쫓기는 남자’라는 비유담이 어린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한 남자가 코끼리에게 쫓기다 우물 속 덩굴을 붙잡고 매달린다. 아래에는 독사들이 있고, 위에서는 코끼리가 기다린다. 덩굴은 밤과 낮을 상징하는 쥐 두 마리가 갉고 있다. 그런데 절망적 위기 속에서도 그는 벌집에서 떨어지는 꿀 한 방울의 단맛에 탐닉하며 직면한 죽음을 망각한다.

“절망과 무상이라는 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때였음에도 그 법문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왠지 모르게 ‘출가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습니다. 절 앞을 며칠 동안 맴돌며 뭔가 중대한 결단을 내리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종진 스님이 직접 낫을 들고 풀을 베어가며 길을 냈다.
종진 스님이 직접 낫을 들고 풀을 베어가며 길을 냈다.

급기야 열아홉이 되어 백양사 산문을 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해야만 출가할 수 있었기에 바로 돌아서야 했다. 진주로 내려간 집에서 맞닥뜨린 것은 아버지의 깊은 병환이라는 무정한 현실이었다. 고민 끝에 경상대 사회학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입학과 동시에 ‘민주화’라는 변혁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열여섯 살 때인 1980년 8월, 학교에 내야 할 등록금을 들고 광주로 향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광주의 5월 참상을 마주했다. 건물 외벽은 3개월 전의 그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구멍 난 벽, 검게 탄 벽면. 총칼 앞의 무고한 생명들이 쓰러진 일을 전하는 사람들의 말속에는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항거’라는 단어를 태어나 처음으로 새겼습니다.”

1학년부터 시작된 수배 생활, 전두환의 철권 통치 아래서의 제적, 노태우 시대의 복적과 재제적, 마침내 김영삼 정부에서의 복적. 제도권 밖과 안을 오가는 궤적 속에서도 하나의 물음을 던지곤 했다.

‘제도를 바꾸면 인간이 변할까?’

그 질문은 결국 러시아로 이끌었다. 사회주의 실험의 현장을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상향에 가까운 사회처럼 보였습니다. 노동자의 권리와 여성 인권이 잘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1달러만 있어도 발레와 오페라를 감상할 만큼 문화예술에 대한 접근성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제도적 허울 아래 숨겨진 인간의 욕망과 부패를 목격했다. 기득권층의 타락, 고위 지도자들의 비리, 국민과의 사이에 깊게 자리한 불신. 

“그때 알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세워도 인간의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결국 원래의 문제를 되풀이한다는 사실을요. 변화의 핵심은 ‘마음’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귀국 후, 해인사 산문을 열고 사미계를 받았다. 세속의 개혁에서 마음의 개혁으로. 사회학도의 질문이 수행자의 결심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수행 여정이 독특하다. 선원에서 정진하다 돌연 2009년부터 8년간 여러 재가 선원에서 명상 수행에 전념했다. 

“부석사 선원에서 정진할 때입니다. 초기 정진은 실로 유익했습니다. 무상과 허무의 경계에서 다행히도 허무로 빠지지 않고 무상을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만성 두통과 관절염, 장염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신체적 치유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희유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날, 제 옆에 입적을 각오한 스님이 가부좌를 틀었습니다. 그 후, 날이 거듭될수록 그 스님은 건강을 회복해 가는데, 정작 제 몸이 굳어갔습니다.”

정진을 거듭할수록 신체 경직은 더 심해져 심각한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이 현상을 이해하고 치유할 수 있는 새로운 수행법을 찾아 나섰고, 그 과정에서 명상을 만났다. 명상은 종진 스님을 새로운 수행의 여정으로 안내했고 몸도 치유됐다.

‘보리명상회’를 창립하고, 서울불교대학원대학에서 자아초월상담학도 전공했다. 그 과정에서 티베트 마음 정화 수련법으로 알려진 로종(Lojong)을 만났고, 수행을 통해 이를 심화해 갔다.
“로종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람과 상황을 모두 수행의 재료로 삼아, 그 안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자비를 넓혀가는 것을 중요한 실천으로 삼습니다.”

조계종 보리선원장을 거쳐 선운사 명상학교장을 역임하며 한국 명상 지도의 중심축이 되어갔다. 

보림사의 템플스테이는 종진 스님의 수행 경험과 신념이 잘 드러나는 공간이다. 관광형 프로그램이 아닌, ‘명상을 실제로 하려는 사람’만을 선별해 받는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문을 열고, 참여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춤형 지도를 제공한다. 종교를 따지지 않고, 연령을 가리지 않는다. 실제로 불자뿐 아니라 기독교인과 이웃 종교인, 무종교인이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에 묶여 있기에 현재에 저항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온전히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명상의 본질에 다가서는 길입니다. 지속성이 중요합니다. 명상은 단박에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빠르게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늦더라도 꾸준히 정진하는 이가 진정한 변화를 경험합니다.”

작은 연못과 종무소.
작은 연못과 종무소.

명상은 일회성의 치유가 아니라 평생의 수련이라는 깊은 통찰이다.
이러한 수행 깊이를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친환경·자연 친화적 인프라를 갖춘 캠핑장형 템플스테이를 조성 중이다. 절 아래 2700평의 땅을 매입하고는 기초 공사와 요사채 건립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는 캠핑 문화를 통해 젊은 세대와 가족 층까지 포용하는, 포교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시도다. 이르면 2027년에 문을 열 수 있다고 한다.

명상 템플스테이 참여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바로 3000평 규모의 죽림정원이다. 처음엔 밀림처럼 덮여 있던 숲이었다. 그 안에 길을 내고, 돌담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

“보림사에서 수십 년 수행해온 신도들조차 이처럼 큰 대나무 숲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저 역시 호기심에 발걸음을 옮기고서야 비로소 그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댓잎 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면, 제 마음도 대나무처럼 비워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겉은 단단하되 속이 비어 있는 대나무의 공심(空心)이 주는 지혜는 이 숲을 찾는 이들에게 깊은 영감을 전하고 있습니다.”

보림사 주지로 부임한 건 2019년 9월이었기에, ‘코로나 19’와 함께 닥친 산중 사찰의 전형적인 어려움에 직면했다. 고령화하는 신도들, 산지 사찰의 제한된 자원, 줄어드는 참배객들. 그러나 낙담하지 않았다.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걸었다. 

새롭게 조성한 지장전과 산신각.
새롭게 조성한 지장전과 산신각.

주지 부임 5년간 자력으로 총 6억 원의 예산을 들여 지장전·산신각·종각·공양간·종무소 등 신·개축 불사를 완성했다. 전라도 산중 사찰이 신도들의 자발적 동참으로 이 정도 규모의 불사를 이루어낸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장전을 새로 조성할 때는 특별한 인연들이 겹겹이 이어졌다.

“연세 많은 거사님이 절에서 가족의 제사를 올릴 수 없겠느냐는 요청을 하셨습니다. 거기에 중국 구화산에서 10년간 정진한 거사께서 구화산의 사리를 보림사에 봉안하고 싶다는 원을 더했고, 구화산 김교각 스님 다큐멘터리의 제작자인 KBS PD께서 방장스님으로부터 받은 염주를 기증하셨습니다. 이 모든 인연이 한데 모여들 때,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임을 깨달았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일상이 회복되었지만 고령 신도들의 사찰 방문이 쉽지 않자, 스님은 스스로 마을로 내려갔다. “사람이 오지 않으면 내가 간다”는 마음으로 2023년 2월부터 ‘찾아가는 초하루 법회’를 시작한 것이다. 매달 한 번, 20~30명의 어르신을 모시는 이 법회는 어느덧 26회를 넘겼다. 정읍시 북면과 인근 마을을 돌며 마을회관과 노인정을 법당 삼아 이어지고 있다.

“사실 법회라기보다 어르신 잔치에 가깝습니다. 법문은 짧게 줄이고, 신도들이 직접 준비한 반찬을 대접하며 민요·트로트 공연으로 함께 웃습니다. 종교도 가리지 않고 누구나 환영합니다.”

이 꾸준한 발걸음은 지역을 변화시켰다. 초파일 방문객은 300명에서 800명으로 늘었고, 주민들은 “보림사 덕분에 마을이 환해졌다”고 말한다. 오는 12월 6일에는 정읍 국민체육센터에서 1500명 규모의 ‘보림사 어르신 효 큰잔치’도 열린다. 모든 인연이 겹겹이 이어져 만들어진 행사다.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명상 프로그램을 마친 다음 날, 우연히 ‘찾아가는 초하루 법회’ 봉사 현장을 함께하게 됐습니다. 그 순간이 큰 감동으로 남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언젠가 천 명의 어르신께 따뜻한 밥 한 끼를 드리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 자리에서 글로벌다이렉트의 최민우·선우창림 공동대표가 ‘저희도 함께하겠습니다’ 하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시골 절일수록 온라인이 절실하다”며 유튜브 채널 ‘산사의 하루(A Day in a Mountain Temple (Borimsa Temple)’를 연 종진 스님이 꿈꾸는 보림사는 어떤 산사일까? 

산신각에서 내려다본 보림사 전경.
산신각에서 내려다본 보림사 전경.

“보림사가 수행의 도량이자, 머문 이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치유의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절에 오는 모든 이들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하고 돌아간다면,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종진 스님이 말하는 이러한 비전은 이미 도량 곳곳에서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대나무 숲길과 지장전·산신각, 명상 템플스테이·캠핑장까지 수행과 치유가 한 호흡으로 이어지는 도량의 모습이 조금씩 완성되어 가고 있다.

“산중 사찰의 신도가 줄어드는 현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찾아가는 포교’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삶 속으로 먼저 걸어가면, 그 마음이 다시 절로 돌아오리라 믿습니다.”
보림사가 나아갈 방향이자, 종진 스님이 걸어온 여정에서 내린 결론이기도 하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802호 / 2025년 11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종진 스님은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수지했다.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불교학을 전공한 후 내장사, 선운사 등에서 포교국장으로 활동했다. 또한 여러 재가선원에서 명상 수행 정진(8년) 후 보리 명사회 지도법사(5년) 소임을 맡았다. 서울불교대학원대학 자아초월상담학을 전공(석사 수료) 했으며, 이후 조계종 보리선원장, 선운사 명상학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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